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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메조소프라노 최은총이 ‘로미오’로 변신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로미오는 남성인데, 여성 가수가 남자인 로미오 역할을 맡은 것. 빈첸초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탈리아 버전이다. 줄리엣은 카풀레티 가문의 딸이고, 로미오는 몬테키 가문의 아들이다.

작곡가는 두 주인공이 10대인 점을 고려해 로미오 역을 ‘M.Sop(메조소프라노)’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벨리니와 각별한 사이였던 여성 가수를 밀어주기 위해 ‘이건 여성이 불러야 해’라고 아예 작정하고 배역을 못박았다고도 한다. 바지를 입고 남자를 연기한다고 해 ‘바지 역할(trouser-role)’이라고 부른다.

‘로미오 최은총’이 ‘이 사랑스러운 일을 맡아 기쁘군요…로미오가 당신의 아들을 죽였다 할지라도(Lieto del dolce incarco…Ascolta, se Romeo tu’ccise)’를 불렀다. 로미오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평화 사절단으로 위장해 카풀레티 가문을 방문한다.

로미오가 카펠리오(줄리엣의 아버지)의 아들을 죽인 것은 실수였으며, 이제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며 화해의 시그널을 보낸다. 최은총은 제가 줄리엣과 결혼해 죽은 아드님을 대신해 아들 노릇을 하겠다며 우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상대의 마음을 녹이려고 애쓴다.

소프라노 최영신은 ‘줄리엣’을 맡았다. 방에 홀로 남은 줄리엣은 로미오를 그리워하며 슬픔에 빠졌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이 비통하다. 줄리엣은 아버지가 정해준 테발도와 결혼하기 위해 웨딩드레스를 입고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탄한다.

최영신의 목소리에 실려 ‘혼례복을 입고 선 내 모습…아 몇 번인가 눈물에 젖어(Eccomi in lieta vesta…Oh! quante volte)’가 흘렀다. 특히 ‘아 몇 번인가 눈물에 젖어’가 관객의 가슴을 적셨다. 하프 반주가 애절하다. 그 누구라도 이 선율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리. 35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벨리니의 모습이 살짝 오버랩되기도 했다.

라벨라오페라단이 내년 공연 예정인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I Capuleti E I Montecchi)’의 1막 주요 장면을 공개해 분위기를 띄웠다. 살짝 맛보기로만 보여줬을 뿐인데 “역시 벨리니!”라는 찬사를 이끌어내며 2024년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아름다운 귀호강 노래가 이어지며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줬다.

라벨라오페라단은 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그랜드 갈라(Grand Gala)’를 개최했다. 서울시가 주관하는 서울대표예술축제에 9년 연속 선정된 공연이다. 장은혜와 박해원, 두 명의 지휘자가 한 무대에서 각각 다른 프로그램을 선보여 눈길을 사로잡았다. 장은혜는 1부 ‘오페라 명곡 하이라이트’를, 박해원은 2부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 : 로미오와 줄리엣’을 맡았다.

또한 이번 공연에서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리골레토’ ‘라보엠’ ‘카르멘’ ‘돈 조반니’ 등 다양한 오페라를 연출한 홍민정이 연출뿐만 아니라 직접 해설까지 맡아 갈라 콘서트를 빛냈다. 정식 오페라 무대는 아니지만 가수들이 최상의 연기와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동선을 짰다.

이날 무대에 오른 성악가는 모두 14명. 그 중 10명이 ‘라벨라오페라스튜디오’ 출신이라 의미가 깊었다. 내일의 오페라 스타 키우기 프로젝트가 정착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셈, 라벨라오페라스튜디오는 사회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우수한 실기 능력을 갖춘 성악 전공자를 전원 장학생으로 선발해 오페라 가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2010년 시작해 지금 12기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150여명의 성악가를 배출했으며, 현재 이들은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다. 단원 중 실기 우수자에게는 특전이 주어진다. 라벨라오페라단의 정기 오페라에 주·조역 출연 및 각종 음악회에서 중견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1부 오프닝은 라벨라오페라단이 지난 5월 국내 초연해 빅히트한 ‘로베르토 데브뢰’ 서곡이 장식했다. 라벨라오페라단은 2015년 ‘안나 볼레나’, 2019년 ‘마리아 스투아르다’에 이어 ‘로베르토 데브뢰’까지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려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을 완성했다.

꼬박 8년이 걸렸다, 국내 민간 오페라단이 외국에서도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세 작품을 한국 초연한 것은 사실상 ‘사건’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장은혜 지휘자와 베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엑설런트했다.

서곡에 이어 우리 귀에 익숙한 유명 오페라의 결정적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냈다. 소프라노 이유진과 홍선진은 “내 남친이 더 잘생겼어”라며 서로 애인의 초상화를 꺼내들고 ‘자랑질 배틀’을 벌였다.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에 나오는 ‘아! 보라 나의 자매여’를 부르며 피오르딜리지·도라벨라 자매의 은근한 질투심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소프라노 김효주·최영신·이유진, 테너 김지민, 바리톤 이주성, 베이스 양석진은 ‘코지 판 투테’의 ‘소개하지 데스피나’를 6중창으로 선사했다. 돈 알폰소가 귀족으로 분장한 굴리에모가 페란도를 피오르딜리지·도라벨라 자녀의 하녀인 데스피나에게 소개해 주는 신(scene)이다.

로시니 ‘세비야 이발사’에서는 2곡을 뽑아냈다. 바질리오 역할을 맡은 베이스 금교동은 바르톨로에게 제안을 한다. 로지나가 알마비바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니, 알마비바아에 대한 추문을 퍼뜨려 쫓아내 버리자고 말한다. ‘험담은 미풍처럼’은 요즘 말로 가짜뉴스 만들기 프로젝트인 셈이다.

소프라노 김효주는 ‘방금 들린 그대 음성’으로 완벽 로지나를 선보였다. 선율이 아름답다. 소프라노들의 최애 아리아 중 한 곡이다. 내가 아무리 순진해도 사랑을 위해서는 강해질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잘 드러내 더욱 공감을 이끌어냈다.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돼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루치아. 결국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첫날밤에 남편을 살해하는 비극적 스토리를 담고 있는 작품이 도니제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다.

소프라노 김효주, 메조소프라노 최찬양, 테너 김지민·원유대, 바리톤 이주성, 베이스 양석진, 그리고 메트오페라합창단이 ‘그 누가 나의 슬픔을 거두어 주리’를 웅장하게 연주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에드가르도가 루치아의 약혼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배신감에 저주와 비난의 말을 쏟아내는 장면의 6중창이다.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 가득했다.

‘로베르토 데브뢰’에 나오는 노래 3곡을 잇따라 선사했다. 1부 처음에 서곡을 배치하고 1부 마지막에 3곡을 연속해서 붙임으로써 ‘로베르토 데브뢰’의 5월 감동을 다시 한 번 더 선사하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소프라노 조현애, 테너 원유대·김지민, 바리톤 임희성, 베이스 금교동은 합창단과 케미를 이뤄 ‘나쁜 놈! 가라, 죽음이 네 머리를 노리고 있다’를 들려줬다. 로베르토가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자베타가 분노하며 사형을 명하는노래다.

사라는 로베르토로부터 마지막 편지를 받는다. 그는 편지 내용처럼 여왕에게 반지를 전달해 자비를 간청하려 하지만 노팅험에게 편지를 빼앗긴다. 배신감을 느낀 노팅험은 아예 사라를 가로막는다. 메조소프라노 최찬양과 바리톤 임희성은 ‘로베르토의 편지야’를 이중창으로 부르며 숨 막히는 긴장감을 전달했다.

엘리자베타는 뒤늦게 로베르토의 사형 집행을 멈추라고 명한다. 안타깝게도 늦었다. 이미 로베르토는 숨졌고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넋을 잃은 엘리자베타는 모든 것을 체념한다. 소프라노 조현애, 메조소프라노 최찬양, 테너 김지민, 베이스 금교동, 그리고 합창단은 ‘그가 흘린 피는’를 부르며 1부를 마무리했다.

2부 ‘카플레티가와 몬테키가: 로미오와 줄리엣’은 박해원이 지휘했다. ‘로미오’ 최은총과 ‘줄리엣’ 최영신을 비롯해 최원진(테너)이 테발도 역을, 양석진(베이스)이 카펠리오 역을, 금교동(베이스)이 로렌초 역을 맡았다.

서곡에 이어 1막의 대표곡들을 실타래 풀 듯 하나씩 보여줬다. 이른 새벽, 카플레티 일가의 가신들이 모여 라이벌 몬테키 가문을 없애버려야 한다며 합창한다. 메트오페라합창단이 쏟아내는 웅장한 사운드는 비장했다.

곧바로 ‘이 칼로써 복수하리라’가 이어졌다. 테발도는 앞장 서 로미오를 죽이겠다고 나서고, 카펠리오는 딸 줄리엣을 테발도와 결혼시켜 세력을 확장하려 한다. 줄리엣과 로미오의 사랑을 알고 있는 로렌초는 카펠리오를 말려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세 사람의 각자 다른 속마음이 분출했다.

1막의 시그니처 노래는 단연 베스트였다. 로미오 최은총은 ‘이 사랑스러운 일을 맡아 기쁘군요…로미오가 당신의 아들을 죽였다 할지라도’를, 줄리엣 최영신은 ‘혼례복을 입고 선 내 모습…아 몇 번인가 눈물에 젖어’로 존재감을 뽐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의 기쁨은 너무 짧았다. 로미오는 줄리엣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말했지만, 줄리엣은 아버지의 강한 사랑의 힘이 자신을 이곳에 묶어두고 있어 떠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줄리엣과 로미오는 사랑의 이중창 ‘우리는 도피하리’를 불렀다.

카풀레티 가문의 사람들이 줄리엣과 테발도의 혼례를 축하하며 ‘기쁘고 행복한 밤일세’를 합창한다. 이때 무장한 로미오의 동료들이 난입해 결혼식이 엉망이 된다. 로미오는 혼자 있는 줄리엣에게 도망가자고 다시 설득하지만, 카펠리오와 테발도에게 발각돼 정체가 탄로 난다. 5명의 성악가와 합창단이 ‘소란은 그치고…이 담장 안은 침묵에 잠겼네’로 2부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출처 : 데일리한국(https://daily.hankooki.com)
민병무 기자 (min66@hankooki.com)